1980년대를 주름 잡았던 이탈리아 디자인
알레산드로 멘디니, 에토레 소트사스, 마이클 그레이브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이탈리아 디자이너로
1980년대 이후 세계 디자인 역사를 새로 쓴 장본인이며,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촉발시킨
배후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기능주의 디자인이 모더니즘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막강한 흐름을 형성하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디자인 경향이
점차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디자인의 미학적 개념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알레산드로 멘디니였다.
그는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졌지만
세계적인 건축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뛰어난 디자인 이론가이기도 했다.
또한 디자인 활동과 이론 활동을 오가면서
이탈리아 사회가 힘들었던 시기부터 이탈리아
디자인의 부흥을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실험해왔으며,
기능주의 디자인을 대체할 새로운 개념의 디자인을
만드는 데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와도 관계가 깊다.
1980년대부터 국내 유수의 기업,
관공서들과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기 때문에
국내에 그가 남겨놓은 디자인 흔적들도 적지 않다.
많이 알려진 디자이너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작 그가 역사적으로 이루어 놓은
업적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점도 있다.
세계적인 디자인 흐름을 바꾼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탈리아 디자인의
부흥 과정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지금은 명성이 잦아들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디자인은 세계 최고로 꼽혔다.
당시 디자인하면 이탈리아,
이탈리아 하면 디자인이 연상되었을 정도로
이탈리아 디자인은 디자인 그 자체였다.
이탈리아 밀라노는 디자인 수도로 인식되었었다.
지금도 그 영향력은 밀라노 가구 디자인 박람회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매년 열리는 밀라노 가구 디자인 박람회에는
여전히 전 세계 수많은 바이어들과 디자이너들이 모이며,
이름은 없으나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스타덤에 오르는 등용문 역할을 한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존재감이
국제적으로 인지되기 시작했던 시기는
1980년대 전후부터였다.
산업 디자인이나 건축 분야에서는
1982년, 에토레 소트사스를 필두로 한
멤피스 그룹이 첫 전시를 하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디자인이라고 볼 수 없는 희한한 것들이어서
디자인계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에토레 소트사스가 만든 책장이
대표적인 디자인은 책장을 나누는 판들이
수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디자인이 나오기 직전만 해도 기능주의 디자인이
팽배해서 쓰기 편하고 튼튼하며 만들기 쉬운 형태가 아니면
디자인으로 취급되기 어려웠지만,
이 책장은 그 견고한
디자인 관념을 대번에 선입견으로 만들었다.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기만 한다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이 디자인이 기능주의 디자인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때문이었다.
이전 기능주의 디자인은
그야말로 무생물의 물질, 필요성에만 기여하는 도구에 그쳤다.
물질적으로만 만들어진
도구가 사람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렵다.
에토레 소트사스의 책장은 무생물로서의 책장에 그치지 않았다.
책장의 기능은 부족할 수 있으나
이 책장을 보고 부족한 기능성을 비평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대신 희한하게 생긴 책장으로부터
책장에 대한 선입견을 깬 사람들은
유쾌함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디자인이 많지만
1980년대 초에는 디자인으로부터
이런 경험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조형적으로 보면 이 책장 디자인은
마치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의 조각 작품 같아서
쉽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난해한 형태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장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런 난해함을 유머로 받아들였다.
실험적 조형을 대중이 유머러스하게 느끼도록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탁월한 솜씨로 조율했기 때문이다.
멤피스 그룹은 이런 가치를 가진 디자인을 선보이면서
기능주의 디자인을 넘어서는 새로운 디자인 세계를 만들었으며,
이탈리아 디자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확고부동하게 만든다.
당시 에토레 소트사스가 디자인했던
또 다른 장식장을 보면 난해한 미술 작품처럼 보이지만
몸체는 값싼 합판으로 만들어 시트지를 붙였고,
몸체 위 원목은 칠도 안 하고 잘라서
비스듬하게 세워 놓았다.
그 옆에는 휘어진 금속 파이프를 결합했고,
이유 없이 빨간 램프도 붙여놓았다.
가구에 램프가 붙는 것도 특이하다.
결과적으로 이 가구는
디자인이라기보다는 설치 미술 같은 외형이다.
신기한 것은 미술 작품으로는 난해한 형태지만,
가구로는 재미있는 형태라서
역시 지극히 실험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다가가지 않았다.
이전 기능주의 디자인은
사용하기 전까지는 지극히 무표정하게
존재감 없이 대기하고만 있었다.
그보다 이런 디자인은
사용하기도 전에 이미 예술적 품격을 가지고
먼저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가구로 보이기 이전에 특이한 가구로
먼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매료시켰다.
단순한 재료나 형태로 디자인되었지만,
사실 이 가구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미술 작품 같으면서도
디자인 같은 역설적인 존재감을 가지며
기능적인 만족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능주의 디자인만 존재하던 시기에
갑자기 이탈리아에서 근본이 다른 디자인들이 나타나면서
세계 디자인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산업 디자인은
산업적 생산 체계 안에서 기능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고민은 깊어갔지만 생산 수단이 없는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 디자인은 산업 생산 체제 안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70년대에 이르면서 기업 이익만을 위한 활동으로
국한되었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기능성에 대한 변질도 의심받기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새로운 유형의 디자인은 단박에 기존 디자인을 뒤로하고
디자인 판을 새로 짜게 되었다.
얼핏 보면 장난 같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커서
세계 디자인 흐름을 바꾸었다.
당시 멤피스 그룹 전시에 참여했던
미국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디자인 흐름을 곧바로
미국으로 가져가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으로 발전시켰다.
이탈리아의 새로운 디자인 경향은
단지 이탈리아 디자인이 아니라
모더니즘 디자인에 대한 대안으로
세계 디자인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마이클 그레이브스가 이탈리아의 유명 주방용품 회사
알레시를 위해 디자인했던 주전자를 보면
멤피스 그룹의 디자인 경향과 흡사하다.
주전자임에도 색이 두드러지고,
주전자 주둥이에 캐릭터처럼 생긴 새 모양을 끼워서
물이 끓으면 소리가 나도록 했다.
기능적이면서도 그 기능성을
상징성으로 바꾸는 문화적 솜씨가 뛰어났다.
주전자 형태는
옛날 이탈리아나 유럽의 고전 건축을 연상케 한다.
문화적 배경만 달랐지 마이클 그레이스와
멤피스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경향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멤피스 그룹의 디자인 경향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 양식으로 일반화하면서,
이탈리아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보편적인 문화 운동으로 격상시켰다.
1982년 멤피스 그룹의 첫 전시 이후
전시에 참여했던 디자이너들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급부상했다.
마이클 그레이브스도 미국 디즈니 본사나 호텔 등을
디자인하며 세계적인 건축가로 활약했다.
재기 발랄한 컬러와 대중적으로 흥미진진한 캐릭터들을 도입한
그의 건축은 이전의 기능주의 디자인과는
근본을 달리하였으며,
당시 미국 건축계는 경쾌하고 발랄한 포
스트모던 디자인이 이끌게 된다.
이탈리아 디자인에서는
만화 캐릭터까지 안 들어갔는데,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미국 대중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아이콘을 접목하면서
조금 다른 디자인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이탈리아 고전 건축 이미지를
차용하여 흥미롭고 재미있는 형태를 구성하는 방식은 같았다.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건축이나 산업에서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기존의 기능주의 디자인을 뒤로하고
당대 디자인 흐름을 주도했다.
'끌리는 디자인의 비밀'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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